멕시코시티의 어느 큰 시장 그늘진 한구석에 포타-라모라는 나이든 인디언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20줄의 양파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어떤 미국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입니다."
"두 줄은 얼마요?"
"20센트입니다"
"세 줄에는 얼마요?"
"30센트"
"세줄을 사도 깍아주지 않는군요. 세줄을 25센트에 주실래요?
"안됩니다."
"그럼, 스무 줄 전부는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나는 스므 줄 전부를 팔지는 않습니다."
"안 판다니요? 당신은 여기에 양파를 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서라피(멕시코아 중남미에서 어깨걸이나 무릎덮개 등에 쓰는 색깔이 화려한 모포)를 좋아합니다. 나는 햇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는 페드로와 루이스가 와서'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하고 담배를 태우며 자기 아이들이나 곡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이 내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종일 여기 앉아서 스무줄의 양파를 팝니다. 그러나 내가 내 모든 양파를 한 손님에게 다 팔아 버린다면, 나의 하루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럼,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다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
[시튼의 동물기 中]
나는 삯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위해 일할 것이다.
경제적인 수록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력이 없으면 조금 피곤해진다.
세상의 중심에 경제가 들어오면서 모든 일이 돈이 중심이 되어버렸다.
삶은 잃어도 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미련함이 세상의 한가지 뚜렷하 주도적 가치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경제적인 이유가 관계와 대화를 이끌어 간다.
대화의 이유도 대화의 결론도 심지어 대화의 시간도 경제적이어야한다.
철학적 향연은 이제 대중이라는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오늘은 누군가와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경제적인 대화(?)가 아닌 내 삶을 휘두르는 마으의 깊은 샘에서 나오는 영혼의 대화를 하고싶다.